중경삼림을 보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멍멍이와 함께 지내다보니 영화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멍멍이는 새벽 여섯시에 일어나서 산책을 하고, 집에 돌아와 밥먹고 간식볼을 굴리며 한두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낮잠에 들면 내게도 오전 열시부터 오후 두시까지의 자유시간이 생긴다. 그 자유를 나 역시 잠을 자거나, 집에서 영화를 보거나, 인터넷 서칭을 하면서 보냈는데 오늘은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시간에 걸린 영화는 죽은 시인의 사회.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서 아직도 보지 않은 게으름. 다시 하루에 하나씩 영화를 볼테야, 작심은 다행히 3일을 가는 중이다.
코로나19로 영화관이 힘들지만, 상황과 별개로 영화를 보기에는 참 편한 때다. 상영관에는 사람이 없고 좋은 고전영화가 재개봉한다. 보고 싶은 영화가 많지만, 아무래도 극장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니, 내게는 재개봉 소식이 반갑기도 하다. (물론 만드는 사람들은 사정이 다르겠지만) 그리고 오늘도 극장에서 크게 이 영화를 보니 참 좋았다.
가끔 years and years 같은 시리즈물이 교묘한 프로파간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양측의 대비되는 주장의 균형이 깨지는 서사가 프로파간다라고 하는데, 그게 어떤 모양인지 잘 알아보기는 힘들다. 그런 면에서 yrs n yrs에 대한 내 평가가 옳은 것인지 판단하기도, 분석하기도 어렵지만 죽은 시인의 사회는 명확하게 무언가를 드러내면서도 프로파간다가 아닌 영화라고 생각했다. 캡틴이 말하는 삶의 정수를 전하면서도 그것이 교조적이지 않았다는 것이 좋았다. 다만 어떤 사람들의 입장에 더욱 집중할 뿐이다. 교감의 입장보다 캡틴과 아이들의 삶에 집중할 뿐이다.
영화를 보면서 내게도 키팅과 같은 조력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이 영화가 키팅이었다. 무기력한 마음 대신 힘을 얻은 나는 서점에서 월트 휘트먼의 시집을 사고, 집으로 돌아와 멍이를 홍제천에 데리고 갔다. 사람들을 신경쓰느라 새벽 산책이 아니면 홍제천은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멍이도 나도 현재를 누릴 순간이라 생각하니 주저함이 없었다.
차가운 이불. 고통을 덮어주는 차디찬 이불을 나도 지어낼 수 있을까.
+각본상이 이해가 된다. 갈등이 고조되고 서사가 진행되고, 테제와 안티테제간 균형이 걸출하다. 소재는 사소하나, 이야기는 뛰어나다. 무엇보다 서사 자체가 사회이고 삶이다.
"Thank you, boys. Thank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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